11세기 말~12세기 초 일본사

일본사 공부 중 하루카3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부분이 나와 옮겨 본다.

헤이안 후기 약 100년간은 섭관정치(※천황의 외척이 관백(보좌)과 섭정의 지위에 올라 천황을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정치를 행함)가 종식되고n천황의 아버지인 상황(上皇 ※태상천황의 줄임말)이 실권을 장악하는 원정(院政)이 시작되었다. 11세기 후반에 관백인 후지와라노n요리미치의 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171년 만에 섭관가와는 외척관계가 전혀 없는 고산죠(後三条)천황이 1068년 즉위했다.n천황은 섭정을 두지 않고 스스로 정치에 임하였다.
뒤이어 시라카와(白河)천황은 고산죠천황의 뜻을 받들어 스스로 정치에n임하였다. 그리고 1086년에 아들인 호리카와(堀河)천황에게 천황의 지위를 양위하고 자신은 상황이 되어 원청(院庁)을 열고n천황의 뒤에서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는 원정을 시작했다. 이후 원정은 토바(鳥羽), 고시라카와(後白河) 상황으로 이어져 100년n동안 지속되었다. 상황은 지금까지 섭관가에 억눌려 있던 중하급 귀족이나 측근을 중심으로 정치를 행하고, 지방에서 세력을 확대하고n있었던 겐지(源氏)나 헤이시(平氏)의 무사를 임명해 군사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들 세 상황은 모두 불교를 신봉하였기 때문에 출가하여 법황(法皇)이 되어 많은 사원을 건립하였다.
1156n년에는 천황가와 귀족이 얽혀 패를 갈라 분쟁하면서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상속자의 지위 계승을 둘러싸고 천황가와 섭관가에서n내분이 생기면서 일어난 것인데,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를 끌어들인 고시라카와천황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호겐의n난(保元の乱)이라고 한다. 이 난에 동원된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가 이끄는 양 무사단은 이 사건을n계기로 세력을 크게 확장하여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이 난은 귀족사회 내부의 싸움도 무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다는n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한편, 1159년에는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난을 일으켰으나 타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진압되었다.n이를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키요모리는 요시토모를 누르고 무가 최고 실력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n하였다. 전란 평정 이후 키요모리는 승진을 거듭하여 1167년에 무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태정대신이 되어 실권을 행사하였다.n키요모리는 딸을 타카쿠라(高倉)천황과 결혼시켜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안토쿠(安徳)천황이 즉위하자 외할아버지로서 권력을 장악하였다.n그러나 하늘을 찌를 듯한 권세는 이에 억눌린 구세력과 지방무사들의 강한 반발을 일으켜 반(反) 헤이시(平氏) 세력의 결집을n촉구하게 되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전제정치가 극에 달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고시라카와법황의 황자와 미나모토노n요리마사(源頼政)는 타이라씨를 타도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군대를n일으키고, 이외에 시나노(信濃), 오미(近江), 시코쿠, 큐슈 등 각지에서 타이라씨에 반발하는 무사단이 봉기하여 타이라씨와n미나모토씨 간의 5년에 걸친 오랜 싸움(源平合戦겐페이갓센)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최종 승리한 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로 그는n1185년에 타이라씨를 멸망시켰다.
타이라씨 멸망 후 고시라카와법황은 요리토모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동생인n요시쯔네(義経)를 중용하여 겐지를 분열시키고자 하였으나 요리토모는 오히려 법황을 위협하고 요시쯔네 체포명령을 받아 내어n요시쯔네를 감싸고 있던 오슈후지와라씨(奥州藤原氏)를 멸망시켰다.

출처 – 내가 공부하는 책- _-

(본문 중 몰라도 문제없는 부분은 삭제했음. ※는 내가 덧붙인 것)

하루카3에 대입해 보면
타이라노 키요모리 → 원령으로 되살아난 헤이케(平家)의 우두머리
안토쿠천황 → 헤이케에서 데리고 도망 다니는 꼬맹이
고시라카와법황 → 종종 나오는 그 땡중(…)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쿠로의 형
요시쯔네 → 쿠로. 고시라카와법황의 요시쯔네 중용은 하루카에서도 쿠로 루트에서 나옴. 덧붙여 쿠로의 이름은 한자로 源九郎義経(미나모토노 쿠로 요시쯔네).